“Is your refrigerator running? Well, you’d better go catch it before it runs away!”

“당신의 냉장고는 잘 작동하나요?(달리나요?) 그렇다면 도망가기 전에 얼른 잡아요!”

-영미권의 오래된 농담

의외로 냉장고에는 코끼리 외에도 다른 것들을 넣을 수 있다. <냉장고>라는 무심한 제목이 붙은 화면 중앙에 놓인 이 평범한 냉장고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있다. 반찬통에는 김치, 감자조림이 들어있고 국과 밥도 있다. 감자 두 개와 양파 하나도 있다. 쌀도 있고, 김치도 큰 락앤락 통에 들어있으며, 숟가락 통 밑에 패트병 뚜껑도 있다. 이런 것 이상의 것들이 필요하다면, 그것들도 얼마든지 넣어서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다.

냉장고는 무엇을 보존하는가? 사실, 냉장고는 무언가를 ‘보존(保存)’하기에는 다소 어설픈 물건이다. 아무리 신선한 상태의 음식물을 냉장고에 넣어도 그것은 길어야 일주일 후면 부패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냉장고의 용도는 보존보다는 보관에 더 어울려 보이며, 무엇인가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냉장고에 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동국 작가의 냉장고는 무엇이든, 영원히 보존한다.

모든 것은 이 평범한 구식의 냉장고로부터 시작된다. 한동국 작가가 소중한 일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방식은 냉장고에 반찬을 넣는 것 같이 아주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인 제스쳐로 구성된다. 먼저, 작가는 보존하고 싶은 일상의 장면들을 모은다. 그리고 장면들을 목탄이라는 재료로 매개하여 화면에 옮긴 뒤, 그 순간들에게 예정된 파국의 미래를 설정한다. 영원히 보존하고 싶은 순간들을 굳이 수집하여 그것들을 일부러 파국에 빠트리는 것은 일견 이상해 보이지만, 그것이 한동국 작가의 보존법이다. 일상의 장면들을 보존하는 이러한 방법은 미래의 순간에 의지하여 지탱되는 특수한 원리로 작동한다. 작가는 ‘이전’을 그리기 위해 ‘이후’를 가정하고, 그 ‘이후’에 의해, 그리고 ‘이후’에 의해서만 ‘이전’은 영원히 보존된다.

보존되는 것들

한동국 작가가 상정하는 미래로서의 ‘이후’는 주로 죽음의 순간이다. 죽음은 굳이 애써 상정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찾아오는 미래이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죽음은 더욱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핵폭탄이 떨어지기 3초 전이라는 급박한 순간이나, 그보다 더 짧은 순간인 죽음 직전의 섬광과 같은 것이다. ‘이전’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이후’를 상정해야 한다는 역설은 먼 미래 뿐 아니라 아주 짧은 기다림으로 성취될 미래에도 해당되는 것이어서, 3초 전을 그리기 위해서는 3초 후를 상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핵폭탄이 떨어지기 3초 전을 그리기 위해서는 3초 후 핵폭탄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상정해야 한다. 상정된 ‘이후’는 제목이나 작은 폭탄의 도상 같은 약간의 장치를 통해 드러나며, 이 약간의 장치를 통해 감상자는 화면 속의 세계에서 한 발 물러나 자신만이 미래를 알고 있다는 기묘한 느낌에 빠진다. 화면 속의 인물들은 다가올 미래를 전혀 모른 채 평온하며, 이 평온한 3초 전의 순간은 영원히 박제된다. 결국 화면 속의 3초 후는 화면 속에서 영원히 성취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이후’를 통해 보존되는 ‘이전’의 역설이다.

<핵폭탄 떨어지기 3초 전> 시리즈에서 핵폭탄의 이미지 외에 이후 벌어질 사건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마저도 아주 작게 그려지거나 숨겨져 있고, 그려진 사람들은 완벽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며 건축물과 풍경은 평소의 모습대로 침착하기만 하다. 오직 작가가 잠시 미래에서 끌어온 3초 후의 재앙이 이 일상을 평범함에서 평범하지 않음으로 전환시키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La molestia, incluso eso> 2024)나 <Bäckerei Müller>(2024) 같은 여행의 순간에도 이러한 재앙은 공평하게 적용된다. 이 경우 설정된 죽음의 미래는 여행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오히려 일상의 순간으로 전환시키며 평준화시킨다. 이 일상의 흑백 스냅 사진 같은 장면들은 냉장고나 아파트, 산책로 같은 평범한 사물이나 장소부터 로드킬을 당한 동물의 사체와 해수관음상 같은 특별한 소재들까지 가리지 않고 채택된다. 이러한 무작위성은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선언 같기도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누락된 일상은 없는지, 그 사각지대를 누락시키지 않으려는 꼼꼼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꼼꼼하게 수집된 일상의 평범하거나 특별한 장면들은 한 장면으로서 영원히 보존된다.

<섬광> 시리즈에서는 이 ‘이후’의 시간이 3초보다 더욱 더 짧게 설정된다. 이제 장면은 단순한 목탄화보다 더욱 더 흑색과 백색의 대비가 강조된 섬광의 순간으로 그려지고,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남은 시간은 더욱 짧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음 직전의 순간은 덤덤하기만 하다. <섬광 속 계곡에서>(2024), <섬광 속 전시관람>(2024)과 같은 작품들에서, 작품 속의 일상에는 전혀 죽음의 혼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작품 속의 사람들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은 작품의 제목을 알고 있는 감상자 뿐이고, 이 작품 속의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장치는 작가가 상정한 핵폭탄이라는 섬광 속 미래 뿐이다. ‘섬광 속’이라는 제목의 일부와 흑백의 강한 대비감으로 표현된 섬광의 효과라는 아주 약간의 장치를 통해 끌어 당겨진 미래의 순간은 평범한 일상을 완벽한 재앙의 직전이라는 순간으로 전환시킨다.

문을 굳게 닫아 걸기

<현관문> 시리즈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작가가 보존하려는 ‘이전’의 순간들을 지탱하는 ‘이후’에 대한 감각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현관문> 시리즈는 한동국 작가가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천착해온 주제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현관문은 아주 단호하고 견고하게 닫혀 있다. 문고리를 돌리면 사실 아주 쉽게 열릴 수도 있겠지만, 굳게 닫힌 이 문은 쉽사리 열어볼 수 없는 위압감을 준다. 문은 전통적으로 다른 세계를 여는 포탈(portal)같은 매개적인 도상으로 이용되어왔다. 작가 자신 또한 작가 노트에서 “현관문은 내게 있어 삶과 죽음의 경계이자 통로가 되었다.”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그렇다기에 이 문은 완벽하게 일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너무나도 ‘지나치게’ 삶의 세계에 속해 있어서 오히려 낯설고 두려운 감각을 야기하는 이 현관문은, 결국 작가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사건보다도 일상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일상의 사건들이고, 죽음은 특수한 사태가 아닌 일상의 사건인 것이다.

누가 3초 후를 두려워하는가? 문을 아직 열지 못한 사람이 두려워한다. 작가는 왜 3초 후라는 ‘이후’를 두려워하게 되었나? 문을 열고 들어가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문턱을 넘어선 이후 무슨 경험을 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닫혀 있는 문 안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다는 두려움은 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고, 그 결과 한동국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의 형상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다. 현관문, 대문, 비상구, 심지어는 냉장고의 문이나 화장실의 문에 이르기까지, 한동국 작가는 그 모든 통로를 검고 견고한 문으로 차단한다.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매끈하며 흠집 하나 없는 문의 형상은, 문 앞에서 아주 오랫동안 서성여 본 사람만 그려낼 수 있다.